BLACK STORY 02: 반타블랙, 현실을 초월한 검은 세계의 여정

극도로 어두운 배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계단식 구조물. 반타블랙처럼 빛을 거의 흡수하는 깊은 어둠 속에서 미세한 명암 차이로만 구분되는 층계 형태가 보인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 뚫린 구멍 같았다." 반타블랙을 처음 본 갤러리 큐레이터가 한 말이다. 그의 반응은 과장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물체가 마치 이차원의 평면으로 보이는 경험은 실제로 인간의 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런데 이 놀라운 물질을 둘러싼 이야기는 과학보다 더 드라마틱한 전개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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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TORY 1편부터 읽기 - 블랙홀과 빛의 부재가 풀어내는 검은색의 신비

빛의 99.965%를 흡수하는 반타블랙의 등장

"세상에서 가장 검은 물질!" 2014년 영국의 나노시스템즈(Surrey Nanosystems)가 개발한 '반타블랙(VANTA Black)'은 빛의 99.965%를 흡수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검은 이 도료는 굴곡이 있는 입체 표면에 칠하면 마치 굴곡 없는 평면처럼 보인다. 입체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에 구멍이 뚫린 듯한 착각이 드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 물질은 나노튜브라는 미세한 탄소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빛이 이 구조 안으로 들어가면 계속해서 반사되다가 결국 열로 변환되어 사라진다.

투명한 상자 안에 있는 반타블랙 코팅 은박지. 중앙의 반타블랙 코팅 부분은 실제로는 울퉁불퉁한 은박지 위에 성장되었음에도, 빛을 99.965% 흡수하는 특성으로 인해 모든 표면 질감이 사라져 완전한 평면처럼 보인다. 주변의 코팅되지 않은 은박지와의 극명한 대비가 반타블랙의 독특한 광학적 특성을 보여준다.

요철이 있는 은박지 위에 형성되었음에도 완전히 평평한 표면처럼 보인다. Credit: Surrey NanoSystems, Vantablack grown on aluminum foil,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과학에서 예술로, 반타블랙의 여정

반타블랙은 광학 장비에서 미세한 빛 누출을 방지하는 용도로 개발됐다. 특히 우주 망원경과 같은 정밀 관측 장비에서 내부를 코팅해 빛의 산란을 최소화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지만, 그 잠재적 용도는 훨씬 더 광범위했다. 그런데 이 물질이 세상에 알려지자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바로 예술계였다.

반타블랙을 놓고 예술계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인도 출신의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예술적 용도로 반타블랙의 독점 사용권을 획득하자, 많은 예술가들이 분노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색을 독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예술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색상에 대한 독점권이라니, 마치 누군가 하늘색이나 초록색의 사용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황당하게 들렸다.

셈플의 반격, 색 전쟁의 시작

이에 영국의 예술가 스튜어트 셈플(Stuart Semple)이 "검은색은 모두의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셈플은 카푸어가 반타블랙의 예술적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색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블랙 2.0'을 판매할 때, 조건을 걸었다. "이 제품은 아니쉬 카푸어에게 판매되지 않으며, 구매자는 이 제품이 아니쉬 카푸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을 법적으로 동의한다"는 내용의 계약에 동의하도록 했다.

어두운 배경에서 검은 니트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남성이 복싱 장갑을 착용하고 강렬한 펀치를 날리는 남성 실루엣 이미지. 흑백 대비가 뚜렷한 이 사진은 아티스트 스튜어트 셈플이 아니쉬 카푸어의 반타블랙 독점에 대항해 만든 '블랙 2.0' 색채 전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셈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분홍색인 안료"(핑키스트 핑크)를 개발하고, 카푸어가 이 핑크색을 획득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면서도 셈플은 "만약 누군가가 이 핑키스트 핑크를 카푸어에게 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 사람에게 블랙 2.0을 평생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자신이 개발한 핑크색을 카푸어가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그 핑크색을 카푸어에게 전달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마케팅 전략을 펼친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색 소유권의 논쟁

이 도발적인 제안은 소셜 미디어에서 큰 화제가 됐고, 색과 창작의 소유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술계에서 '누가 색을 소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셈플의 반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19년에는 '블랙 3.0'을 출시했다. 이는 반타블랙에 근접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모든 예술가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과학계의 MIT 초블랙 개발

한편, 과학계에서는 더 완벽한 검정을 향한 경쟁이 계속됐다. 2019년 MIT 연구팀은 반타블랙보다 더 검은 물질을 개발했다. 이 새로운 물질은 빛의 99.995%를 흡수했는데, 이는 반타블랙보다 약 10배 더 검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이 물질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색상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극한 추구의 심리와 철학

이렇게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완벽한 검정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기술적 성취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이것이 우리 내면의 극한 추구 본능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등산가가 더 높은 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더 깊은 검정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한계를 밀어붙이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열망을 품은 존재다.

또한 완벽한 검정은 철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다. 우리는 빛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면서 완벽한 어둠, 절대적 부재의 상태를 상상하기 어렵다. 반타블랙 같은 초흑색 물질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개념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마치 우리 감각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과 같다.

초흑색의 실용적 응용과 미래

산업적으로도 초흑색 물질의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카메라 내부, 망원경, 태양광 집열판 등 빛의 산란을 최소화해야 하는 분야에서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 BMW는 2019년 반타블랙으로 코팅한 콘셉트카를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마치 2차원 실루엣처럼 보이는 이 차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검은색을 둘러싼 이 모든 경쟁과 갈등, 그리고 혁신은 색에 대한 인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색은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문화적, 정치적,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넓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사람의 흑백 사진. 한 사람이 밝게 비춰진 콘크리트 구조물에 앉아 있으며, 주변은 완전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고독과 고립감을 표현한 미니멀한 구도의 사진.

누군가에게 검은색은 우울함의 상징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게는 우아함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반타블랙과 그 경쟁자들이 보여주는 검정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이며, 가능성의 한계를 확장하는 도전이다. 어쩌면 우리는 완벽한 검정을 통해 단순히 색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인식과 지각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완벽한 검정을 추구하는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더 깊은 어둠, 더 완벽한 부재의 상태를 향해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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